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더글러스 맥아더/평가 (문단 편집) ==== 1950년 겨울 ==== || [[파일:1110061501.jpg|width=100%]] || 1950년 11월 25일, 중공군 제13군단이 한국군 2군단을 청천강에서 요격하면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청천강 전투]]에서 대패한 유엔군은 12월 동안 중공군에게 밀려난 끝에 38선 이남으로 퇴각했고 1951년 1월 4일엔 서울에서 후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맥아더는 갑작스런 중공군의 기습으로 군대가 와해 지경에 이르자 경악한 나머지 며칠 동안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다가 1950년 11월 28일 "전투 상황은 우리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났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중공군의 진격속도를 늦추기 위해 압록강 건너편 다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트루먼은 고문들과 긴밀히 의논한 뒤 이를 승인하지 않을 것라고 선언했다. 이에 맥아더가 항의하자, 대통령과 합참의장은 중국의 공역을 침해하지 않는 조건 하에 다리를 폭격할 수 있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이지 않은 작전이었고, 중공군에게 완벽하게 압도당한 유엔군과 한국군이 12월 말에 전면 철수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만약 연합군이 청천강에서의 패배 이후 평양을 사수하며 제대로 된 방어선을 펼쳤다면 중공군의 보병 기동전을 차단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펼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는 별다른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했으며, 그 결과 미군이 지휘 체계도 회복하지 못한 채 대공황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중공군 보병들은 이미 한반도의 백두대산에 스며들어 연이은 공세를 퍼부었고 미군은 자랑하는 화력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며 피해가 누적되었다. 결국, 1950년 12월 29일 미국 합참에서 맥아더에게 철수를 지시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새로 부임한 8군 사령관 리지웨이를 설득하여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이 계속 전투를 지속하도록 한다. 그럼에도 계속 전선이 후퇴하자 맥아더는 [[지평리 전투]]에서 패할 경우 아예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키고 한국 정부를 일본으로 이전시키는 계획까지 세웠다. 만약 이게 이뤄졌다면 한반도 전체는 [[적화통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태가 온전히 맥아더'만'의 실책으로 벌어진 것인지는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1950년 10월~11월 당시 미 중앙정보부와 합참본부의 상황 파악은 맥아더보다 낫다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맥아더의 낙관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소련과 중공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맥아더의 견해에 적극 동조했다. 실제로 기밀 해제된 미 중앙정보부와 합참본부의 1950년 10월과 11월자 비밀문서 중 맥아더의 결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내용이 담긴 것은 거의 없다. 그리고 맥아더 휘하 참모들도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보기 어렵다. 가령 제10군단장 에드먼드 알몬드 소장은 중공군의 전면 개입으로 혼란이 극에 달했던 11월 말에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공세를 강요했다가 막심한 피해를 초래하고 현지 장교들의 강력한 항의를 못이기고 철수를 허락했다. 그리고 맥아더의 오랜 부관인 찰스 윌러비도 상관의 뜻에 동조해 중공군이 적극 개입할 리 없다는 낙관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또한 맥아더의 참모들은 현지 지휘관들의 의견을 맥아더에게 전달하지 않고 자기들 선에서 커트하기 일쑤였고 맥아더가 상황 수습을 어려워하는 시기에 자신들이 대신 맡기는 커녕 같이 당황해했다. [* 에드먼드 알몬드 소장과 정보참모 찰스 윌러비는 대표적인 맥아더의 YES맨 이였다. 그 들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은 맥아더의 판단이였고, 이 부분에서 맥아더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훗날 찰스 윌러비는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시스코 프랑코의 고문이 된다.] 트루먼 대통령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가 맥아더의 말을 믿었다가 뒤통수 얻어맞았다고 하지만, 그가 상황을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기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9월 30일 저우언라이가 유엔군이 38선을 도하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했고 이후에도 마오쩌둥 등이 미군이 압록강까지 진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맥아더가 낙관론을 제기하는 걸 별 의심없이 받아들였고 맥아더의 압록강 진군 요청을 수락했다. 유엔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진군할 경우 중공이 심각한 위협을 느낄 것은 자명했지만, 그는 맥아더만 믿고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했다. 그는 훗날 자신은 맥아더가 유능한 군사 전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었다고 밝혔지만, 이는 구차한 변명일 뿐 그 역시 1950년 겨울의 파멸을 초래한 장본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